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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4일에 모 주간지에 실렸다는 기사입니다.
정말 감동.. 또 감동입니다.
열정과 노력, 끊임없는 쇄신과 윈-윈 정신.
그저 본 받을 것이 한 가득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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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원 전무는 1956년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 용인대 특수체육교육학과를 졸업했다. 1986년 국가대표
양궁 코치를 시작으로 1990년 국가대표 남자양궁 감독, 2000년 국가대표 양궁 총감독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대한양궁협회 전무이사, 세계양궁연맹 발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


세계 양궁계 극심한 견제 속에서도 변함없는 챔피언

 

지금 한국은 세계 양궁계에서 양궁 발전을 저해하는 국가로 찍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을 견제하기 위해 경기방식을 수시로 바꾸기도 합니다.

 

가장 난제는 장비입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 세계 양궁장비는 남자 선수의 경우 미제, 여자 선수의 경우 일제로 양분됐습니다. 그러다 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1년 앞두고 미국이 장난을 쳤습니다. ‘어떻게 저런 활을 만들 수 있을까’ 우리도 깜짝 놀랄 만큼 획기적인 신제품을 미국의 한 회사가 만들었는데, 미국이 그 회사가 한국에는 제품을 팔지 못하도록 제도적으로 막아버렸습니다. 우리 양궁협회에서 그 제품을 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살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미국 본사에까지 찾아가 올림픽에 쓸 활 4대만 달라고 통사정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결국 우리 선수들은 애틀랜타올림픽 단체전에서 접전 끝에 1점 차이로 미국에 금메달을 내줬습니다. 개인전도 미국 선수에게 져 동메달에 그쳤습니다. 여자개인전과 단체전에서 금메달 2개, 남자개인전에서 은메달 1개와 동메달 1개의 성적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신문마다 ‘한국 양궁 빨간불!’ 이렇게 큰 글씨로 1면 톱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때 저희는 일주일간 정말 처참하게 당했습니다. 한국 양궁이 추락한 이유가 뭐냐, 지도자들이 세계적인 흐름도 읽지 못하고 우리 선수들만 구닥다리 활을 갖고 출전했더라, 훈련도 주먹구구식이다, 이미 실패가 예견됐다…. 그렇게 무능한 지도자로 매도당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외국에서는 한국이 양궁 발전을 저해하는 나라입니다. 예선을 치르면 우리가 1, 2, 3, 4등을 싹쓸이합니다. 시드 배정에서 우리 선수들이 A, B, C, D조에 한 명씩 배정돼 총 128명이 예선을 치르면 마지막 4강전에 남는 게 또 우리 선수들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시청자들이 채널을 돌려버린다는 겁니다. 양궁 저변 확대에 문제가 생긴다는 거죠.

 

이처럼 중요한 순간마다 다른 나라에서 장비로 장난치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생각해낸 게 바로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산입니다. 에베레스트를 인류 최초로 등정한 사람은 뉴질랜드의 힐러리 경(卿)입니다. 그는 1953년 정상 정복에 성공했습니다. 한국인 최초로 등정에 성공한 사람은 고(故) 고상돈 씨인데, 힐러리 경이 성공한 뒤 24년 만인 77년 세계에서 58번째로 정상 정복에 성공했습니다. 24년 동안 58번째라면 1년에 약 2명꼴로 성공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2007년에는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답은 저도 모릅니다.(좌중 웃음) 세계산악연맹의 2004년 집계에 따르면, 1년간 무려 330명이 에베레스트 정상 등정에 성공했습니다. 2005~2006년부터는 집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이유로 아예 그 수를 세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경기방식 변화 예견하고 새 훈련법 끊임없이 개발

 

그렇다면 과거 24년간 1년에 2명꼴에 불과하던 정상 정복자가 왜 이렇게 늘어났을까요? 첫 번째 답은 장비의 과학화입니다. 끊임없이 최첨단의 혁신 장비들이 개발돼 나왔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힐러리 경이나 고상돈 씨가 에베레스트 등정을 시도하던 시절에는 누구나 예외 없이 해발 2000m 고지에 베이스캠프를 정했습니다. 거기서부터 정상까지 엄청난 고난을 극복해가며 등정을 시도했던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베이스캠프를 해발 6700m 지점에 만들고 모든 장비를 그곳에 갖다놓은 뒤 정상 정복을 시도합니다. 2000m만 올라갔다 오면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어렵다는 에베레스트 등정을 수많은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양궁도 산악인들의 이런 발상의 전환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개발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훈련방법을 개발해 극비리에 시행하면, 외국 지도자들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알아내 벤치마킹합니다. 5개월쯤 지나면 우리보다 더 발전된 방법으로 훈련하고 있습니다. 그 5개월간 우리는 전보다 새로운 것을 개발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정상에 서길 포기해야 합니다.

 

저는 양궁 지도자들에게 다음의 5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는 최소한 10년 뒤의 미래를 내다보고 국내외 변화에 대비할 수 있는 통찰력입니다. 일례로 2004년 아테네올림픽 직후 양궁 지도자들에게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선 경기방식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다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수백 가지 답이 나왔는데 그것들을 압축해보니 결국 네 가지 정도로 정리됐습니다.

 

양궁 대표선수단은 이 네 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훈련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베이징올림픽 8개월을 앞둔 지난해 12월 세계양궁연맹에서 베이징올림픽 경기방식을 발표했는데, 우리가 예측했던 네 가지가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습니다. 외국선수들은 8개월 동안 바뀐 경기방식에 적응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려야 하지만, 우리는 4년 전부터 베이징올림픽의 경기방식을 준비해온 것입니다. 바로 이런 통찰력이 중요합니다.

 

둘째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낼 수 있는 창의력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양궁 훈련과 관련된 좋은 소재들이 널려 있습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조금만 바꾸면 좋은 훈련 소재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반드시 따라 배우자고 하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두바이의 최고지도자 셰이크 모하메드입니다. 대한양궁협회 세미나가 열릴 때마다 우리는 늘 이 얘기로 시작합니다. 보세요, 지금 두바이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전 세계 타워크레인의 25%가 두바이에 있다고 합니다. VVIP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7성급 호텔을 최초로 만들고, 버즈 두바이에 800m 초고층 건물을 세우고, 팜아일랜드에 인공섬을 만들고, 하이드로폴리스라는 수중 호텔도 짓고…. 셰이크 모하메드가 말했습니다. “기획과 전략의 원천은 상상력과 창의력”이라고. 이 상상력과 창의력은 곧 생산력이자 개인과 조직의 경쟁력입니다.

 

우리 양궁도 끊임없이 새로운 훈련방식을 개발해내려 합니다. 다른 종목에선 “양궁은 이벤트 훈련을 많이 한다”고들 말하지만 결코 이벤트가 아닙니다. 결정적 순간에 실수를 줄일 수 있는 정신훈련, 팀워크 훈련 등 훈련방법마다 다 의미가 있습니다. 이런 훈련방법을 만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상상력, 창의력입니다.

 

통찰력·창의력·글로벌 능력·조직 적응력 그리고 열정

 

셋째는 글로벌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언어입니다. 영어는 기본이고 제2, 3 외국어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경기방식이 왜 자꾸 한국양궁에 불리하게 바뀌는 걸까요. 세계양궁연맹 집행위원이 33명인데, 주로 유럽 출신입니다. 이들이 경기방식을 바꾸다 보니 한국 선수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한양궁협회도 10여 년 전부터 어학연수를 1년에 두세 명씩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도 글로벌 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우리가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유치하게 됐거든요. 이 대회 이후 집행위원 선임투표가 있는데, 이때 한국 양궁 지도자들을 집행위원회에 넣을 계획입니다.

 

넷째는 조직생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즉 엄격한 도덕성, 신뢰, 성실성입니다. 이 세 가지를 바탕으로 변화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리더십 역량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인간 한계를 넘나드는 극한상황을 경험하는 스포츠 선수들에게 지도자의 리더십은 정말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리더십은 어디서 나올까요? 제가 20년 넘게 선수들을 지도해보니 첫째는 인격, 둘째는 실력, 셋째는 상대에 대한 배려와 헌신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리더십의 3대 키워드입니다.

 

40여 년 전 양궁이 국내에 도입되던 당시의 100대 기업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남은 기업은 12개뿐입니다. 나머지 88개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무한경쟁 시대에는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능력을 어떻게 극대화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점은 각자의 가슴속에 뜨거운 열정을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강조하는 것도 바로 열정입니다. 열정 없이는 어떤 위대한 비전, 거대한 꿈도 잉태될 수 없습니다.

 

매일 새벽 5시 반에 훈련이 시작되면 저녁 8시에 끝납니다. 2시간 동안 자유시간을 가진 후 밤 10시에 소등하고 잠자리에 듭니다. 여러분, 인간 한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숨이 깔딱 넘어갈 것 같은 느낌, 가슴이 찢어질 듯한 아픔…. 그런 한계상황을 하루에 두세 번씩 넘기고 저녁 8시 숙소에 돌아오면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듭니다.

 

그런데요, 2시간의 자유시간 동안 옆에서 TV를 보던 동료가 조용히 밖으로 나갑니다. 10분, 20분이 지나도 안 돌아오면 방에 있던 친구도 덩달아 나갑니다. 그러다 옆방 동료가 방에 와보면 아무도 없잖아요. 그럼 그 동료도 나갑니다. 이렇게 빠져나가다 보면 밤 11시에도 숙소에는 선수가 한 명도 없습니다. “이 녀석들, 또” 하면서 훈련장에 올라가보면 전원이 그 시간에 불 켜놓고 야간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선수들은 엄청난 경쟁 속에서 살아갑니다. 뜨거운 열정이 없다면 이런 경쟁에서 단 하루도 버틸 수 없습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한국과 중국의 여자양궁 단체 결승전 때 일입니다. 중국 선수들이 다 쏘고 한국 박성현 선수가 마지막 한 발을 남겨놓은 상태였습니다. 박 선수가 10점 만점을 쏘면 우리가 우승이고, 9점을 쏘면 중국과 동점으로 재경기, 8점을 쏘면 우리가 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수들이 활을 쏘고 들어올 때마다 “잘했어”라고 말하고 하이파이브를 ‘탁’ 하면 물이 튑니다. 손에 땀이 흥건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당시 박 선수가 쏠 준비를 할 때 중국 선수들이 방해하려고 소란을 피웠습니다. 이단옆차기를 날리고 싶을 정도로 중국 선수들이 미웠죠. 그런데 그 순간 박 선수의 눈빛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 초긴장의 순간에 눈빛 하나 흔들리지 않고 타깃을 바라보는 카리스마가 대단했거든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10점을 쏘고 나서 말 그대로 난리가 나지 않았습니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제가 박 선수에게 “그 마지막 순간, 마음상태가 어땠느냐”고 물었습니다. 박 선수의 첫마디가 “죽는 줄 알았어요”였습니다. 겉으로 그처럼 늠름해 보였지만 속으론 엄청난 공포를 느꼈다는 겁니다. 활을 쏴야 하는 40초 동안 고국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부모님, 가족, 친구들을 생각하니 제대로 서 있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뛰더라는 겁니다. 그러다 문득 지난 4년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때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바로 쏴버린 활이 10점 과녁에 들어갔던 겁니다.

 

바로 그거였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에 박 선수가 아닌 다른 어떤 한국 선수가 거기에 서 있었더라도 10점 과녁을 꿰뚫을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했습니다. 결정적 순간에 실수를 최소화하기 위해, 우리가 상상치 못했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가정해 끊임없이 적응훈련을 하며 대비했습니다.

 

북파공작원 훈련장에서 선수들 기절 직전까지

 

어머니가 열 달 산고(産苦)를 거쳐 아이를 낳듯, 우리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도 열 달간 열 번의 대회를 치러 선발됩니다. 그렇다고 아무나 선발전에 참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 참가 자격은 2007년 남녀 랭킹 100위까지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100등 안에 들어가는 것부터가 무척 치열합니다. 보통 한 달에 한두 번씩 전국대회가 열리는데, 여기서 2주일만 훈련을 소홀히 해도 바로 100등 밖으로 밀립니다. 국내에서 남녀 랭킹 80등 정도 하면 세계 랭킹 5위 안에 듭니다. 이런 선수들이 100명씩 모여 열 달간 열 번의 대회를 치르는 겁니다.

 

그 열 번의 대회가 똑같은 방식으로 치러지는 것도 아닙니다. 1차전은 체력이 좋은 선수가 기록이 잘 나오도록 대회 방식을 만들어놨습니다. 2차전은 정신력이 뛰어난 선수를 가려내기 위한 방식입니다. 11월 강원도에서 대회를 치르는데, 선수들은 닷새간 얇은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밖에서 경기를 합니다. 11월의 강원도는 춥습니다. 비라도 오면 손가락이 곱아 감각조차 없어집니다. 한마디로 정신력 싸움인 겁니다.

 

3차전은 담력, 4차전은 집중력, 5차전은 근성, 6차전은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력, 이런 식으로 대회마다 다른 목적을 가지고 치릅니다. 7차전은 최종 8명에서 4명이 남는 대회이기 때문에 선수들은 한 발 한 발에 엄청난 압박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이를 잘 극복하는 선수가 좋은 점수를 받도록 경기방식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7차전이 끝나면 100명에서 남녀 각 4명이 남습니다. 이 선수들이 국내 대회 한 번, 국제대회 두 번을 더 치릅니다. 국내 대회에서는 잘하는데 국제대회에만 나가면 헤매는 선수가 있거든요. 그렇게 나머지 한 명을 걸러내면 최종적으로 남녀 각 3명이 올림픽 대표선수가 됩니다.

 

그런데 환경 변화에 적응력이 뛰어난 선수를 어떻게 뽑는지 궁금하시죠? 간단합니다. 7월에 대회를 치르는데, 먼저 기상청에 문의해 태풍이 올라오는 날짜를 뽑아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자료를 통해 태풍이 올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날짜를 넣어 일정을 잡습니다. 그럼 대회가 열리는 닷새간 무조건 하루는 걸리게 돼 있거든요.(좌중 웃음)

 

지난해 대회 때 누구라고 하면 다 알 정도의 간판급 스타선수가 있었습니다. 그 선수가 시위를 당기기 위해 섰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물은 발목까지 차오르고…. 이럴 때 활을 쏠 수 있겠습니까? 조준 자체가 안 됩니다. 그런데 제한시간은 흘러갑니다. 이때의 갈등은 말도 못하죠. 그러다 선수가 순간적으로 바람이 잦아드는 듯한 느낌을 받았나 봅니다. 쐈거든요. 한데 바로 그 순간 ‘빠방’ 하면서 천둥이 쳤고, 그 선수가 깜짝 놀라 0점을 쏴버리고 말았습니다. 올림픽 2관왕에 세계선수권 2관왕, 아시안게임 2관왕. 누가 봐도 세계적인 스타인데 그 한 발 때문에 국가대표에서 탈락했습니다.

 

긴 안목으로 보면 원칙을 지키는 게 옳습니다. 그 덕에 고등학교 1학년의 어린 선수가 여자 4명이 남는 단계까지 올라왔습니다. 무명 선수도, 나이 어린 선수도 열심히 하면 국가대표가 될 수 있다는 강력한 동기부여가 된 셈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어느 선수라도 ‘그 자리에 서면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많은 훈련을 합니다. 양궁팀이 공수특전단에서 훈련을 한다는 사실은 잘 아실 겁니다. 한 달 전엔 북파공작원이 훈련했던 HID에 다녀왔습니다. 그런 곳에 가면 여자선수들은 기절 직전까지 갑니다. 남자선수들도 팬티에 오줌을 쌀 정도니까요.

 

올림픽 한두 달 전에는 경기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선수가 많습니다. 그럼 우리는 선수들을 서부 최전선 부대에 데려갑니다. 군복 입고 철모 쓰고 실탄 지급받고 GOP로 들어가 경계근무를 서게 되죠. 이걸 왜 하느냐. 밤새 자기성찰 시간을 가지면서 복잡한 머릿속을 단순화하자는 의도입니다. 그래서 이 훈련을 하고 나면 정말 머릿속이 단순해집니다. 아무 생각 없이 잠도 잘 자거든요. 그러다 또 생각이 복잡해지면 다시 집어넣습니다.(좌중 웃음)

 

그런데 지도자들은 뒷전에서 놀며 “야, 너희들 갔다와” 이러면 선수들이 제대로 하겠습니까? 지도자들도 똑같이 군복 갈아입고 들어갑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말씀드리는 양궁 훈련들은 지도자가 먼저 시범을 보이거나 함께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선수들에 번지점프 시범 보이느라 감독이 9번 뛰어내려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기 전 선수들을 충주호에 있는 65m짜리 번지점프대에 데려갔습니다. 좀전에 제가 뭐라고 했죠? 가장 먼저 지도자가 시범을 보여야겠죠? 그렇게 시범을 보이고, 그 다음에 선수들을 뛰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한 여자선수가 뛰지 못했습니다. 감독이 30분간 그 선수를 설득했습니다. “다 뛰는데 너는 왜 못 뛰느냐. 너는 능력도 있고 배짱도 있다. 못하는 건 결단력이 부족해서 그렇다. 만약 올림픽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맞닥뜨리면 어떻게 할 거냐. 해봐라. 넌 할 수 있다….”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했습니다.

 

그래도 안 되니까 이번엔 감독이 다시 뛰었습니다. 뛰고 내려와서 또 30분간 설득합니다. 그래도 안 되면 감독이 올라가서 다시 뛰어내리고…. 그런 식으로 충주에 간 첫날 감독은 아홉 번이나 뛰어내렸습니다.

 

그 다음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선수의 소속팀 감독에게 연락해 올라오게 했습니다. 선수와 소속팀 감독 그리고 대표팀 감독 이렇게 셋이 또 충주호에 갔습니다. 이번엔 두 감독이 그 선수를 설득했습니다. “너는 뛸 수 있다” 이렇게 끝까지 힘을 북돋워 준 겁니다. 그래도 못 뛰잖아요? 그럼 이번엔 소속팀 감독과 대표팀 감독이 함께 뛰어내립니다.

 

나중엔 말이죠. 감독들이 “제발 나 좀 살려줘”라고 통사정합니다. “선생님이 불쌍하지도 않냐. 이게 며칠째냐?” 소속팀 감독은 또 무슨 죄가 있습니까? 국가대표 선수 길러낸 죄밖에 더 있습니까? 불려와 덩달아 뛰는 겁니다. 사흘째 되던 날, 두 발을 땅에 딱 붙이고 있던 선수가 갑자기 “으아~” 소리치며 일어나더니 “차라리 죽어버릴 거야” 하며 번지점프를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뛰어내려 성공한 겁니다. 거기 한 번 뛰는 데 4만원이더라고요. 첫날에만 감독이 아홉 번 뛰었는데, 다섯 번 뛴 것만 돈을 받았습니다.(좌중 웃음) 그걸 보면서 선수가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그 선수는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뛰었을 겁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선수였거든요. 그 선수에게 “두어 번 더 뛰어내리자”고 해서 두 번 더 시켰습니다. 결국 그 선수가 독일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냈습니다.

 

우리가 자주 하는 훈련 중에 천호대교에서 63빌딩까지 걸어가는 게 있습니다. 약 26km 거리입니다. 가장 추운 1월 중순, 밤 12시 반에 출발해 최대 속보로 가면 보통은 아침 7시경 63빌딩에 도착합니다.

 

지난해 12월20일에는 제주도에 갔습니다. 밤 9시에 앞뒤 사람 간격을 1km로 두고 출발해 1100도로를 거쳐 중문, 서귀포로 해서 표선까지 걸었습니다. 11시간 걸렸습니다. 표선에 도착해 오전 11시경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선수들을 버스에 태워 관광을 시키는데, 이게 실은 선수들 잠 못 자게 괴롭히는 겁니다. 밤새 걸었기 때문에 차에 태우면 얼마나 잠이 오겠습니까? 잠이 들 만하면 “하차!”, 찬바람 맞고 잠 다 깨면 5분쯤 뒤에 “승차!” 이렇게 온종일 계속하면 남자든 여자든 반은 미쳐버립니다.

 

그런데 선수들이 왜 화를 못 내는지 아십니까? 지도자든 감독이든 자기들과 똑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감독이 자기는 잠자면서 선수들에겐 “야, 내렸다 타” 이랬다면 쿠데타가 나도 몇 번은 났을 겁니다. 똑같이 하니까 화도 못 내고, 자신에 대한 울분만 풀어내는 겁니다. 그렇게 돌다가 22일 새벽 4시에 다시 표선에 도착했습니다. 30분간 밤참 먹고, 새벽 4시40분부터 다시 걸었습니다. 앞뒤 사람 1km 간격으로 세워 한라산 정상까지 갔습니다.

 

 

끊임없이 위기의식 주입 … 칼날 위에서 근성으로 살아남기


당시 최연소 선수가 중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우리가 표선에서 출발할 때는 비가 왔는데 한라산을 3분의 2쯤 올라가니 눈보라로 바뀌어 앞이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 어린 선수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엄마, 엄마” 하면서 막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코치들이 옆에 붙어 “하나 둘, 하나 둘” 격려하며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 어린 선수도 결국 한라산 정상까지 갔습니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이 잠 한 숨 안 자고 무박3일 훈련을 소화해낸 겁니다.

 

우리 민족을 동이족(東夷族)이라 합니다.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이라는 뜻입니다. 한국 양궁의 성공이 과연 타고난 기질 덕분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양궁의 성공은 뼈를 깎는 노력과 치밀한 전략의 결과입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동반자가 필요합니다. 가장 조화로운 분위기에서 최고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는 겁니다. 서로 강점을 인정하고 약점을 보완하면서 성취를 이뤄가는 것이 함께 성장하고 승리하는 윈-윈 파트너십입니다. 개인이 좀더 나은 삶의 질을 창출하려 노력할 때 자기가 몸담은 조직도 글로벌 조직으로 커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동반자 정신, 주인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양궁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수가 너무 힘들다 보면 “그래, 나 하나 금메달 포기하면 되지” 하는 상황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선수 개인이 금메달을 놓친 게 아니라 대한민국 양궁, 나아가 우리 한국 선수단이 금메달을 놓친 게 됩니다. 그래서 주인의식과 동반자 정신이 필요한 겁니다.

 

오늘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남은 인생의 첫날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죠. 그래서 우리 선수들에게 늘 말합니다. 매순간 살아가는 의미와, 무엇이 돼야 하고 무엇을 이룰 것인지를 생각해보라고 말입니다.

 

살다 보면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고, 내일도 모레 같고…, 그렇게 어영부영 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차’ 하면 누구나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는 실패한 삶입니다. 끊임없이 위기의식을 갖는 게 필요합니다.

 

저는 선수와 지도자들에게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첫째, 매순간이 승부다. 둘째, 우리는 진정한 프로페셔널이다. 그러니 프로정신과 프로 근성으로 살아라. 셋째, 적어도 조직을 관리하는 리더라면 자기가 있어야 할 그 시간에 바로 그곳에 있어야 한다.

 

우리 선수들은 20대 초반에서 30대 초반까지 약 10년간 운동선수로서의 인생에 마지막 승부수를 펼칩니다. 단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질 뿐입니다. 두 번의 올림픽입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10년간 집중해서 파고들면 다들 경지에 오릅니다. 그런 꿈과 희망을 갖고 인생의 승부를 거는 겁니다.

 

오늘 제 얘기가 여러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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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12 20:43 2008/08/12 20:43
Posted by 티티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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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는 꿈녀님의 빛을 따라서... 입니다.




1.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나의 과거에 대하여 총체적인 책임을 진다.

내가 오늘날 심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재정적으로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선택한 결단의 결과이다. 나의 결단은 언제나 나의 선택에 의해 좌우된다.
나는 나의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늘 적극적인 방향을 지향하고,
파괴적인 방향은 거들떠보지도 않겠다.

결단을 내려야 할 상황이 되면 반드시 결단을 내리겠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늘 올바른 결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일단 결단을 내리는 능력과 또 잘못된 결단을 내렸을 경우
그것을 시정하는 능력은 주셨다고 생각한다.

감정의 기복에 따라 나의 정해진 노선을 벗어나는 일을 결코 없을것이다.





2. 나는 지혜를 찾아 나서겠다.

나는 남들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다.

나는 현명한 사람의 조언에 귀 기울이겠다.






3. 나는 행동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순간을 잡는다. 지금을 선택한다.
나는 언제나 활발하게 행동하는 습관을 들일 것이고 늘 미소를 잊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은 나의 행동을 기다리고 계신다!
하느님은 나에게 정보를 수집하여 분류하는 머리와 결론에 도달하는 용기를 주셨다.

나는 행동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나는 과감하다. 나는 용감하다.

나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실패는 그만두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나 있는 것이다.





4. 내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

방향을 결정하는 힘은 나에게 있다.
내가 내일로 미루는 일은 결국 모레로 미루어지게 된다.

나는 시간을 끌지 않는다.
내가 갖고 있는 모든 문제는 내가 그것을 직접 대면하는 순간 축소된다.





5. 오늘 나는 행복한 사람이 될 것을 선택하겠다.

나는 매일 매일을 웃음으로 맞이하겠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나는 7초 동안 맘껏 웃겠다.
나는 오늘을 흥분된 마음으로 맞이한다.
나는 오늘의 여러 가능성들에 마음을 활짝 연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며 맞이하겠다.
내 미소는 나의 명함이다. 미소는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내가 미소 짓기를 선택할 때 나는 내 감정의 주인이 된다.
낙담, 절망, 좌절, 공포는 내 미소앞에서 다 사라져 버린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의 소유자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절망의 구름을 순식간에 없애 버린다.

나는 남과 비교하지 않겠다.
나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감사하는 마음에는 절망의 씨앗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하느님은 나에게 많은 선물을 주셨다.
나는 이 선물을 늘 고마운 마음으로 기억하겠다.
나는 내 시력, 내 청력, 내 호흡, 이 모든것을 감사하게 받아들인다.

만약 내 인생에서 이것 이상의 축복이 찾아든다면
나는 그 풍성함의 기적에 깊은 감사를 드릴 것이다.

나는 감사하는 마음의 소유자이다.





6. 나는 매일 용서하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맞이하겠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겠다.

지난 여러 해 동안 나의 가장 큰 적은 나 자신이었다.

내가 저지른 모든 실수, 모든 착오, 모든 좌절은 내 마음속에서 거듭 거듭 반추되었다.

지키지 못한 약속, 낭비된 시간, 도달하지 못한 목표는
내 인생에 대한 혐오감을 더욱 부채질 해왔다.

나의 당황하는 태도는 나의 온몸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내가 나를 실망시키는 일이 발생하면 나는 무감각으로 반응했고
그리하여 더욱 더 실망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나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과거의 그림자가 빚어내는 의심, 공포, 좌절을 말끔히 씻어낸다.





7.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물러서지 않겠다.

믿음과 두려움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한 기대감이거나
아니면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마음의 자세이다.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하프타임의 스코어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의 비극은 인간이 그 게임에서 진다는 것이 아니라
거의 이길 뻔한 게임을 놓친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보지 못하는 미래를 믿는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핵심이다.
이러한 믿음의 보상은 내가 믿는 미래를 보게 해주는 것이다.


나는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겠다.
나는 결과에 집중한다.

나는 커다란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폰더씨의 위대한 하루 中 / 앤디 앤드루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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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1/05 19:07 2006/01/05 19:07
Posted by 티티카카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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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5 15:33 2005/07/15 15:33
Posted by 티티카카
[디지털포럼] 미래 CEO에게

전세호 심텍 대표이사


벤처기업에 있어 리더의 자격은 제품력이나 기술력 못지 않게 중요한 요소다. 일반적으로 리더는 검증된 실력과 인격이 있어야 한다. 나이나 학벌, 직장의 연륜과 직급을 내세워 후배들에게 권위주의로 군림하지 않고 실력과 인격으로 설득해 조직을 이끌어 가야 함은 물론이다.

리더들은 끊임없는 자기 계발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배양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부하 직원에게 기꺼이 물려주면서 스스로는 새로운 기술과 정보를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유연성도 갖춰야 한다.

사회 리더는 부하를 행동으로만 평가하지 않고 마음까지 관찰해 서로 간에 감동을 주고받을 줄 아는 인격자다. 그들은 말로만 하는 탁상 공론을 하지 않고 한 번 마음먹으면 행동으로 옮기고 그 결과에 대해서도 기꺼이 책임진다. 그들이 이끄는 조직은 요란하지 않고 질서 있으며 서로에 대한 존경으로 가득 차 생동감이 넘친다.

이런 리더가 회사 업무를 처리하면서 내리는 결정 가운데 종종 혼동을 일으키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다수결과 단독 결정의 구별이 아닌가 싶다. 물론 다수의 의견이 중요한 경우도 상당히 많다.

예를 들어 필자가 몸담고 있는 회사는 직원 식당의 메뉴를 정기적으로 직원들의 설문 조사를 통해 결정한다. 또는 명절에 직원들에게 나눌 선물을 정할 때도 같은 방법으로 다수의 의견을 따르고 있다. 반면 리더들에게는 단독 결정이 요구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독단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미숙한 리더일수록 책임에 대한 부담ㆍ전문성의 결여ㆍ두려움 때문에 다수결로 결정짓고 마는 오판을 하기도 한다.

일본의 반도체 산업이 한국에게 추월을 당한 것이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1메가비트에서 4메가비트로 기술 흐름이 변화할 때, 일본 반도체 회사 경영진이 투자 결정에 대해 주저한 틈을 노려 한국 업체들이 서둘러 4메가비트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시장에서 주도권을 잡은 것은 너무나 유명한 얘기다.

회사는 하나의 생물이기 때문에 모든 상황에서 리더가 내리는 최선의 선택과 그에 따라 움직이는 조직원들의 집중을 통해 성장한다. 이 때 많은 결정이 리더의 전문성과 결단력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 결정들이 회사의 미래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훌륭한 결정은 감각이나 능력에 의해서라기보다 상당 부분 훈련을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놓고 볼 때 미래 CEO는 직장 안에서 부딪히는 모든 상황을 늘 상사에게 보고만 하고 그에 따른 지시를 받기만 할 것이 아니라 조직원 각자가 상황에 따른 최선의 선택을 통해 그 결과까지도 책임지는 습관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조직 내에서는 대폭적인 권한 이양이 있어야 할 것이고 틀린 결정도 수용할 수 있는 경영진의 유연성도 필요하다. 특히 제조업체의 경우 현장에서 하루에도 수많은 결정들이 내려져야 한다. 나는 언제나 젊은 리더들에게 `틀린 결정이 우유부단함보다 낫다'고 얘기한다.

나의 경험으로 얻어진 결정을 내릴 때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해 본다.

첫 째, 흥분 상태이거나 즉흥적인 발상일 때는 어떠한 사안도 결정하지 않는다. 되도록 평심으로 돌아오도록 기다리고 한 번 더 생각한다. 둘째, 내가 내리는 결정이 회사에 득이 될 지 아니면 해가 될 지를 생각한다. 셋째, 내 결정의 동기가 일을 열심히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편하고자 하는 것인지를 생각한다. 이런 세심한 고찰을 통하면 최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미래의 CEO를 꿈꾸는 리더들이여 조직 내에서 내가 내려야할 결정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한다면 결정과 반성을 수없이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판단력이 키워질 것이다. 리더는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만들어진다.

강한 쇠는 뜨거운 불 속을 통과해야 만들어지듯이 미래를 위해 지금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또한 우리 경제의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귀중한 소프트웨어가 되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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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7/15 15:31 2005/07/15 15:31
Posted by 티티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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